가치(價値)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오전9시에 간부회의. 끝나면 이어서...
오전11시에는 디자이너회의.
정오, 거래처와 점심약속.
오후2시 사내 디자인 컴펌. 디자이너들에게 수정시키고...
오후4시 클라이언트 최종 디자인 프레젼테이션.
장부도 체크하고... 그외에도 결재할것들이 있고...
저녁식사도 약속이 있었지?
뭐였더라?...
음...
내일은 강의가 있고...
강의 준비도 해야겠군...
채점도 해야하는데...
그건 집에가서 해야지.
그럼, 디자인은 언제하나?"
디자인은...
디자인은...
...
시간이 가면 갈수록, 회사에서 지위가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실무(實務)에서 멀어지고,
관리직으로 바뀌는게 보통입니다.
디자이너도 예외가 아닌것이 디자인을 하다가 아트디렉터가 되면, 디자인 보다는 방향을 잡고
컨셉을 정하고 디자이너들의 디자인을 봐주는 업무로 전환되고 그외 업무들이 늘어납니다.
그러다 독립해서 사장이 되면, 대외적인 일이 추가되고 이미지업을 위해서는 세미나나 디자인단체의
활동도 하게되면서, 학계의 부름?응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사업에 손을 뻗기도 합니다.
실질적으로 디자이너로서 오직 디자인만을 할 수 있는 기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할수 있습니다.
언젠가 저보다 한참 선배이신 모 디자인회사 사장님과의 사적인 자리의 만남에서, 그분이 대뜸
하시는 말씀이, "자네 사장이 되니까 디자인이 그립지 않나? 그리고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기지는 않나?"
감사하게도 그분의 갈등을 표면에 솔직하게 내세우시며, 제게 질문을 하셨을때는...
내안에 잠재되어있던...
마치 어린시절 처음 엄마를 떠나 낯선 곳에서 극기훈련을 받고 엄마 품으로 다시 돌아온 아이 마냥...
제속에서 그 디자인에 대한 갈망이 솟구쳐 오르는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그토록 사랑했던 디자인을 나의 디자인이 아닌, 남의 디자인으로 나의 디자인화 하여
내것인냥 내보인것 같은 부끄러움과 내 손으로 직접 마우스를 들고 선하나 하나 색깔 하나하나
그리던 때가 너무나도 그리워서 그만 그 자리에서 울컥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처음부터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던 저로서는 섬유공학과 재학시절, 미대생들이 몹시도
부러웠습니다.
그때는 그 커다란 포트폴리오 가방이 어찌나 멋져보였던지...
그리고 과제로 밤을 새우는 그들을 볼때면, 다시 아버님을 설득해서 디자인을 꼭 하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유학을 가게되어서, 제2의 대학생활을 온힘을 다하여 디자인을 배웠습니다.
정말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 아닐런지요...
그리고 졸업후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중... 스카웃제의가 있어서 한국에 와서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야 말로, 제가 미국에서 배운것을 나의 조국에서 쏟아내리라는 각오와 포부로 겁날게 없이
달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1년후 남들보다는 좀 빠르다 싶게 회사를 오픈하게 되었고, 컴퓨터 2대와 직원이래야
저까지 2명이서 밤을 세우며 디자인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규모가 작으니까, 그다지 신경 쓸것도 없이 정말 디자인에만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을 하다보면 여러가지 난관에 부딛치기도 했습니다.
유행에 너무 편승하는것도 같고, 어떤때는 너무 앞서가는 것도 같고...
디자인이 않풀릴때는 길거리를 마냥 쏘다닌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마음에 썩들지 않는 시안을 들고 최고인냥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작품은 좀더 잘해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발길을 돌렸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마냥 행복하다고만 생각하지 않았지만, 디자이너로서 내가 돌이켜볼때 가장 자랑스럽고
뿌듯했던 순간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제법 규모가 커지고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디자인은 디자이너들에게 맡기고,
대내외적으로 다른 업무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나를 발견하곤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늘 머리
속에서 맴돌면서도 특별한 대책이 없음을 알곤 디자인에 대한 나의 미련을 떨쳐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중 그 선배님의 질문을 받고...
단지 나만의 갈등은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되었고...
그동안 제가 암암리에 무시하고 눈감아 버렸던 제 내면의 갈등이 분출되면서...
그 갈등을 정면으로 부딛쳐 보고 싶어졌습니다.
"정말 디자인이... 다시하고 싶다..."
이렇게 시작한 저의 디자인에 대한 갈망은
디자인을 하려면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고, 디자이너가 되려면 초심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그럴려면...제가 움켜쥐고 있는게 많으면 많을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디자인이냐 아니면 현재의 지위냐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 생각들은 자연히 제 말과 행동으로 이어졌고... 주위 환경도 그렇게 조금씩 흘러갔습니다.
저로서는 그동안 가꾸어 온것들을 내어놓아야 하는 뼈를 깍는 아픔도 있고, 뜻하지 않은 오해와
부딧치는 벽들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간을 통과 하고나면 다시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날개가 다시 돗듯
등언저리가 움찔 움찔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감사하게도 제가 신임하는 이사에게 회사를 인계할수 있게 되었고, 저는 뜻한바,
미국으로 돌아와 디자인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2년후...
...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오전에는 디자인 프로젝트 B 컨셉 구체화하고...
점심은 Stephanie와 Lori가 같이 하자고 했지...
요즘 디자인 딜레머에 빠졌다고 걱정하는데... 격려 좀 해줘야지...
오후에는...
음... 디자인 계속..."
모두에게 아침인사를 마치고, 내 자리로 돌아와 오늘 스케줄을 체크합니다.
그리고 미소 짓습니다.
"오늘도 디자인을 할 수 있어 참 좋다."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