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領域)

지금 전철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앉을 자리가 없군요.

서 있는 사람들도 제법 되고요.

저는 문가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전철 안에 사람들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기대지 마시오’라는 스티커가 바로 제 머리 뒤쪽에서 저를 바라보는군요.

 

정거장을 지날 때 마다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또 탑니다.

학생들도 있고 아주머니, 노인들 때로는 군인들도 눈에 띄는군요.

언제부턴가 노약자 보호석에는 자리가 비어도 젊은 사람들은 잘 앉지 않더군요.

예전 어떤 광고가 준 파급 효과일까요? 아무튼 우리나라 시민들의 의식이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전철 안에는 기차에서 나는 철커덩 소리만 날뿐, 모두 조용히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책을 보는 사람,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사람, 핸드폰 문자 보내는 사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감고있거나, 벽에 붙여있는 광고들을 보고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각자 지금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요?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어 간접체험을 하며, 사랑에 빠져있을 수도 있겠죠.

아니면 유명한 가수가 되어 음악 속에서 헤엄치고 있나요?

친 구와의 갈등으로 어떤 핸드폰 문자의 글귀가 그의 마음을 돌이킬까를 놓고 버튼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누를까요? 때로는 눈을 감고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며 상념에 빠지기도 하고,
광고를 보며 자기 뱃살을 의식하고 다이어트를 결심하기도 할겁니다.

 

그럼,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분명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지금 나와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겠지요.

나 와 똑 같이 생긴 사람이 없듯이, 자라온 환경, 교육 등등 각 개인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유일무이(有一無二) 하다고 볼 때, 내가 이땅에 디자이너로서 그런 다양한 고객들을 위해
어떻게 디자인이라는 행위를 해 나가야 하는 가에 대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내가 좋아하고 만족하는 디자인이 과연 최선일까요? 아니면 철저히 대중을 위한 디자인이
디자이너의 길일까요?

 

만약 지금, 이 전철 안에 사람들을 위해 디자인을 해야 한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나는 잠시, 이 전철 한 칸을 내 디자인의 영역(領域)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디자이너로서 인생을 살아 가면서, 무수한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회사를 상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들의 고객이 대중, 즉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내 고객은 전철 안에 사람들처럼 불특정다수(不特定多數) 일 수 밖에 없으며,
또한 각각의 기호와 취향이 매우 다양 할 것입니다.

 

전철 안에 사람들은 늘 변합니다. 모두가 타고 또 모두가 내립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똑같이 같은 정거장에서 타거나 내리지 않고, 누가 어디서 내릴지 또 누가
어디서 탈지는 전철 안의 어느 누구도 알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들은 남녀노소 구별이 없으며, 더구나 그들의 생각은 매우 다양합니다.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이런 다양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어떻게 이해 하고 순응하느냐에
매우 중요한 관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디자인 영역은 그 다양성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경지(境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의 디자인 영역이 많은 대중이 타는 전철이 아니라, 몇 명만 태우는 택시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일정한 학생들만을 태우는 스쿨버스 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한 가족을 위한 자가용승용차 일 수도 있고, 2명 이상 못 타는 자전거 일 수도 있겠지요.

후자에 갈수록 다양성은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영역은 좁아집니다.

늘 똑 같은 한 고객만을 위한 디자인을 한다면, 그 디자이너의 시야는 어떠해질까요?

나의 디자인 영역은 내 스스로 키우는 것입니다.

즉, 클라이언트를 보기에 앞서서 그 뒤에 있는 그들의 고객을 바라보십시오.

클라이언트의 말을 들을 때, 그 이면에 녹아있는 그들 고객의 소리를 들으려 하십시오.

그리고 직접 고객이 되어 생각하고 느껴보십시오.

 

우 리 디자이너들이 클라이언트에게 디자인을 보여주면서,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있는데,
그게 바로, “모두가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디자이너는 자신이 디자인한 작업물이
스스로 너무 마음에 들어서, 클라이언트도 분명 대만족(大滿足)을 하리라 기대하고 보여주면,
전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신랄한 비판만 듣고 오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디자인을 이해 못하고 수정하기를 원하면, 그때부터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를 마치
'원시인’이나 ‘미개인’처럼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최고의 작품을 수준 낮은 클라이언트 때문에, 할 수 없이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디자이너들은 내심(內心) 결과적으로, 클라이언트가 원해서 수정한, 나중 디자인의 반응이
않 좋고,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처음 디자인이 더 나았다는 생각으로, 클라이언트 스스로가
깨닫게 되기를 바라며, 그때부터는 클라이언트를 위해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디자이너 스스로를 위해 디자인을 하기 시작합니다.

즉 처음에 했던 자신이 좋아하고 만족하는 디자인에 미련을 못 버리고, 수정하는 디자인에는
무언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헛점(虛點)을 빠뜨립니다.

그 헛점에는 디자이너 특유의 오만(傲慢)과 증오(憎惡)가 베어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이 바로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의 영역(領域)의 차이입니다.

즉 클라이언트는 그들의 고객 즉 대중(大衆)을 바라보는데 반해, 우리 디자이너들은 바로
눈앞에 고객인 클라이언트나 회사만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영역과 시야의 차이로 인해, 추구하는 바가 달라지고 그 결과 서로
반목(反目)하는 관계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클라이언트를 수용(受容)하려면, 그들보다 더 넓은 시야와 영역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철 안 사람들이 다양하듯, 고객의 생각과 기호가 매우 다양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디자인을 이해 못한다고 멸시 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이해 못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야가 매우 좁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역을 스스로 한정(限定) 짓고 있었던 것 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눈앞에 고객인 클라이언트 만을 위한 디자인을 했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그 클라이언트 회사의 출퇴근 버스정도로 우리의 디자인 영역을 한정 지운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만약 클라이언트의 영역(領域)이 다양한 일반 대중을 위한 전철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전철역(驛)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그들이 우리에게 편안히 와서 그들의 승객을 승하차 시키고 또 편안히 떠날 것입니다.

 

고 객의 다양성(多樣性)을 인정한다는 것은 바로 여러분들의 디자인 영역(領域)을 넓히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나라 디자인이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좀더 다양성을 갖고 디자인 되어,
세계에 우뚝 선 한국 디자인의 미래를 위한 시발점(始發點)인 것입니다.

 

. . . . . .

 

이제 전철에서 내릴 때가 되었군요. 오늘은 저도 그 다양한 고객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내일은 또 이 전철 안에서 어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까요?

 

오늘은 유난히 이 전철역이 크게 보이는 군요.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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