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建築)

날씨가 참 좋군요.
선선한 바람도 맑은 공기만큼이나 저를 아침부터 들뜨게 합니다.
오늘은 경복궁(景福宮) 나들이를 할겁니다.
도심 한가운데 있어도 외국에서 손님이 오시거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게되지 않는곳이라,
오늘은 특별히 내 마음의 여백(餘白)을 찾기위해 시간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으로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왕위에 즉위하면서 한양을 도읍을 옮기고
왕궁으로 경복궁을 창건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조선 최고의 건축가와 장인들이 모여 지은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당당함이나 위용은 입구인 '광화문(光化門)'에서 부터 느낄 수 있습니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무수한 수난을 겪은 우리의 문(門)입니다.
파 괴되고 짚밟히고 역사속에서 수많은 시련을 통과하고, 오늘날 세종로 우리나라 가장 중심부에
당당히 서있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 일본은 광화문의 위치를 옮기면서까지, 조선 총독부(옛 중앙청)를
세웠고, 6.25때는 화재로 석축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를 1968년에는 석축을 모아 제 위치로 옮기고
현판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바꾸었습니다.

광화문이 무엇이길래, 한낯 건축물에 지나지 않는데, 그토록 외세의 침략이 있을때마다 광화문은
허물어지고 없어졌던것일까요? 그리고 왜 후대는 이를 기를쓰고 다시 복원하는데 열을 올렸을까요?
이는 광화문이 왕실과 국가 권위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즉 경복궁이 내포하고 있는 국가가치를 맨 앞부분에서 이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커버(COVER)는 책을 싸고있는 덮개입니다. 이는 책을 파손에서 보호하는
역할도 할뿐만 아니라 그 책이 어떠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가를 알려줍니다.
책의 내용이 동화책인데, 커버를 성인오락잡지 처럼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백과사전같이
두꺼워야할 표지를 내지처럼 얇은 지질를 쓰지도 않습니다.
커버는 책의 내용을 나타내는 표상(表象)의 역할로서 우리는 커버를 통해 안의 내용을 가늠할 뿐만
아니라, 책의 얼굴로서 책 전체를 대표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 커버는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내지의 모든내용을 함축하여 표상하는 커버와
다른하나는 내지의 내용에 들어가기 앞서서 인트로 개념의 분위기만 보여주는, 예를 들어
문학에서 '복선(伏線)'이 이에 해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둘다 내지에 앞서 전면에서 책의
내용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책 전체를 놓고 볼때, 커버는 차지하는 비중은 맨 상단에 놓여있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순위를 매긴다면 1위에 해당하지요. 그래서 기업문화의 꽃인 '에뉴얼리포트'나 기업영업의
첨병인 '브로슈어' 의 경우 커버디자인의 항목을 따로하고 견적단가가 가장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광화문에 들어가서 경복궁내로 들어갑니다.
약간의 마당이 있고 바로 '흥례문'이 있군요. 흥례문 또한 1916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과
함께 완전 철거 변형 되었던 것을 1997년에서야 복원하기 시작하여 1998년 9월23일 상량하고
2000년에 준공하였습니다.
크기는 광화문 보다는 조금 작지만, 그 위용과 화려함은 조금 더 한듯합니다.
뭔가 그 안에 있는 귀한 보물을 살짝 감추고 서서히 드러내는 형색이라고 할까요?
경복궁 안의 실질적인 위용이 더욱더 궁금해집니다.

흥례문을 통과하니, 앞에 높이 솟은 보물 812호인 '근정문'이 보이는 군요.
층이 높아서도 그렇겠지만 우리나라 보물인데다가 그 안을 열고 들어가면, 임금님이 계시고
문무백관들이 쭉 늘어서있는 근정전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절로 뛰기시작합니다.

드디어 국보 제223호인 '근정전(勤政殿)'을 머얼리 앞에 두고, 그 위용에 내 몸을 둘때가
없어집니다.
어딘가에 옆에 비켜서 있어야만 할것 같은...
근정전은 경복궁의 수조정전이며 태조3년에 창건하여, 정종, 세종, 단동,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여러 국왕이 이곳에서 즉위하였습니다.
그 처마곡선의 형세가 뒤에 보이는 북한산의 흐르는 선과 조화를 이루어 선율을 이루는것으로
유명합니다. 지금같이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한것도 아닐텐데 과거 우리 장인들의 안목에
놀라움을 금치못하였습니다.

근정전의 내부를 보면, '어좌(御座)'를 중심으로 그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장엄의 극을 이루는데,
경복궁 전체가 바로 이 '어좌'를 위해 존재하는듯 블랙홀 같이 빨아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내부와 천정 그리고 의장물의 컨셉은 모두 '어좌'를 향해 포커스를 마추었으며, 조선의 가치를
이곳 '어좌'에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디자이너들이 주어진 디자인 업무를 진행하다 보면, 때로는 같은 프로젝트를 오랫동안 계속
할 수도 있고, 또는 계속해서 새로운 일들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 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화나 소설에 기승전결이 있듯이, 모든 디자인에는 그러한 흐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디자인에 똑같이 적용할 교과서적인 공식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디자이너에게 맡겨진 디자인을 크게 보았을때 그곳에는 시작과 진행과 끝이 항상 존재합니다.

기업문화의 꽃이라고 하는, 일년에 단 한번씩만 발행하는 '에뉴얼리포트'의 경우, 그 흐름은 마치
경복궁 같은 커다란 건축물을 보듯, 기업의 모습을 체계있고 가치있게 보여지도록 디자인 되어야 합니다.
마 치 왕이 계시는 최고의 가치와 상징인 근정전을 위해 앞에 광화문부터 시작하여 흥례문을 거치고
근정문을 지나듯, 에뉴얼리포트에서도 커버로 부터 시작하여 인트로페이지, 대표이사 인사말을 거쳐
회사의 비젼과 표방하는 가치를 '컨셉페이지'에서 펼쳐보이는 것입니다.

그 컨셉페이지를 얼마나 할애하는가에 따라, 그 회사가 얼마나 긍정적이며 비젼을 나타내고 있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단지 도표와 다이아그램으로만 에뉴얼리포트를 만드는 회사는 그 기능면을
강조한것이 겠지만, 회사의 주인인 주주들에게 회사의 눈에 보이지않는 가치를 인식시키지는 못하고,
단지 '수(數)'로만 회사를 바라보도록 스스로 내어놓는 꼴이 되는것입니다.
이렇듯 컨셉페이지는 근정전과 같이 에뉴얼리포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커버와 같이 순위1로서
맨 상단에 놓이게 됩니다.
커버로 부터 시작한다면, 디자인 계층(hyerarchy)의 맨위부터 1(커버)-3(인트로)-2(대표인사)-1(컨셉)
정도 되겠지요. 마치 1(광화문)-3(흥례문)-2(근정문)-1(근정전)처럼요.

그리고는 컨셉페이지에 이어서, 회사의 실질적인 상품소개나 대외활동 및 봉사활동페이지 등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계층(hyerarchy)으로 보면 3위정도로 내려가서, 마치 근정전 뒤에 포진해 있는 '천추전',
'사정전', '만춘전'을 보는것과 이어지는데, 이곳에서는 문화창조의 요람이요 새로운 문물을 창제할때
이 전각을 이용했습니다.
또한 옆에 '경회루(慶會樓)'에서 잠시 쉬며 경복궁의 미적인 부분을 한눈에 봅니다.

하지만 근정전에서의 감탄의 고삐를 늦추지않고, 실질적인 기업의 산물(産物)인 한해동안의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와 같은 연차보고서의 도표와 데이타가 이어집니다.
이 는 왕실의 대를 잇는 일과 일맥상통하여, 왕의 침전(寢殿)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실질적이고 투명하되, 조용히 진행되어야 하기때문에
계층(hyerarchy)으로는 가장 낮은 '4'정도로 내려옵니다. 임금님의 침소(寢所)를 보호하듯 말이죠...

이제 마지막으로 '향원정(香遠亭)'을 보고 '신무문'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향원지'라는 연못안에 섬을 만들어 지은 이층 육모정이며, 나무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라 하였습니다.
마치 경복궁에서 느꼈던 감흥을 정리하기라도 하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이 제 기승전결중 '결(結)'에 도달한것 같군요. 디자인에 있어서 정확하게 기승전결이 맞아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렸던 에뉴얼리포트의 경우를 보면, 실질적인 연차보고서의
데이타가 나오고 바로 종결지울수 는 없습니다. 여운을 남겨야지요. 그리고 좀더 끝맺음의 정리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향원지의 향원정을 바라보듯 마지막으로 기업의 이사진들이 나와 인사하는
형식을 통해 에필로그를 향해 나아갑니다.

저는 지금 항시 닫아 두었다가 왕이 어원에 거동 할때나 특별한 경우에만 열었다는 '신무문'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오늘의 경복궁 나들이는 정말 잊을수 없을것 같군요.
지나간 과거의 모습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정문인 광화문부터 시작하여 각 '계층'의 문을 들어가
근정전에서 최고조를 올리고 다시 서서히 그 수위를 조절하여 멋진 풍류와 함께 마무리를 하는...

우리의 디자인도 그러해야 하겠습니다.
시작과 끝도 없이 그때 그때 땜질하듯 디자인을 한다면, 비바람에 쉽게 쓰러지는 초가집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한 나라의 가치를 대변하고 한시대를 풍류하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대대손손 이어지는
경복궁 처럼, 우리들의 가치를 위해 우리 디자이너들이 세워야할 '디자인의 경복궁'은 바로 지금
여러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경복궁 건축(建築)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바로 우리나라 디자인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지금의 땀이 바로
우리 다음세대에 창연하게 빛을 발할것입니다.

계층(階層)의 문들을 통과하며 이루어진 전체를 바라보고, 그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넓은 시야와
근정전의 어좌(御座)같이 한곳으로 집중시킬 수 있는 힘
그리고 돌담의 울타리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프로젝트를 보듬을 수 있는 넓은 가슴...

지금 여러분들의 경복궁은 어떤 모습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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