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餘白)
하얀 종이가 있습니다.
그 위에 '나'를 그립니다.
얼굴을 그리고, 몸을 그리고 큰 아름드리 나무를 그리고 거기에 기대어 앉아있는 내 모습을 그려봅니다.
주위에 나무가 너무 많으면 좀 답답하겠죠? 그래서 언덕위에 그늘이 풍성한 나무하나만 그립니다.
녹색의 잔디와 산들바람...바람은 머리결 방향으로 표현해 봅니다.
멀리 보이는 하늘은 밝은 햇살에 구름한점 없는 청량한 하늘...
어디선가 머얼리 매미의 나즈막한 소리도 들리는 듯 합니다.
"책보는 모습으로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머리를 나무에 기댄체 눈감고 있는 모습을 그립니다.
팔은 팔짱을 낀모습으로... 내가 자주하는 모습이니까...
두다리는 쭉 편체 오른쪽다리를 왼쪽다리 위에 포개었습니다.
신발은 옆에 내려놓고 맨발이 좋겠군요.
눈을 감고는 있지만 시선과 몸의 방향은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하게 그립니다.
아름드리 나무는 오른쪽 끝에 여백없이 꽉채우고, 위쪽으로 굵은 가지가 뻗어서 그늘이 풍성하게 그립니다.
쭉뻗은 다리와 함께, 청량한 하늘은 종이 왼쪽편의 반이상을 차지하게 그립니다.
이제 잠시 그림을 보며, 숨을 고릅니다.
흠~
그림안의 내모습을 상상하며, 심호흡을 해 봅니다.
머얼리 보이는 청량한 하늘이 내가슴을 나도 모르게 크게 내밀게 합니다.
종이위에 산소가 풍성히 내뿜어져 나옵니다.
그리고 어느새 눈을 지긋이 감고있는 내 모습을 발견합니다.
...
이제는 다른 종이위에 또다른 그림을 그립니다.
물론 '나'를 그립니다.
회색의 방입니다.
방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콘크리트벽뿐...
창문도 없고, 빛도 백열등 같은 느낌만...
"책보는 모습으로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까와 같이, 그냥 머리를 벽에 기댄체 눈감고 있는 모습을 그립니다.
팔은 팔짱을 낀모습으로... 두다리는 쭉 편체 오른쪽다리를 왼쪽다리 위에 포개었습니다.
신발은 옆에 내려놓고 맨발로...
눈을 감고는 있지만 시선과 몸의 방향까지 모두 첫번째 그림과 똑같이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하게 그립니다.
머리를 기댄 회색벽은 오른쪽 끝에 여백없이 꽉채웁니다.
쭉뻗은 다리와 함께, 정면의 벽은 종이 왼쪽편의 반이상을 차지하게 그립니다.
...
똑같은 크기의 두장의 그림.
그리고 그안에 그려진 나.
그림안에 '나'는 똑같은 모습을 하고있는데, 두번째 그림에서는 숨을 제대로 쉴수 없는 갑갑함을 느낍니다.
회색의 벽...
두 그림 속에서 '하늘'과 '벽'의 두 공간이 차지하는 넓이는 똑 같습니다.
위치도 같고, 색깔에 차이가 있다면 파란색과 회색의 차이뿐.
그런데 한공간은 공기가 풍성한 쉼터의 역할을 하고, 다른 공간은 공기가 부족한 오히려 진공상태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 각기 다른 장소에서의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극히 상반대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편안히 쉬는 모습과 외롭고 슬픈 모습.
...
제 가 처음 미국에서 '라이프드로잉(Life Drawing)'이라는 누드화수업을 들었을때, '오카루라'라고하는
나이 지긋하신 일본인 교수님께서는 수업시간에 늘, 그림을 그릴때에 Positive(실제적인)부분과
Negative(비실제적인, 반대적인)부분을 동시에 볼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즉 우리가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릴때, 어느부분은 너무도 익숙하여 쉽게 그려나갈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머리에 기억되어있는 사람의 형태가 눈을 통하지 않고 바로 손으로 가서 그려나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양옆구리에 양쪽손을 얹은 당당한 모습을 그린다고 합시다. 흔히 꺾인 팔의 모습과 손의 모양
그리고 가슴으로 부터 내려오는 옆구리와 배부분 그리고 엉덩이와 다리를 그려나갑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팔의 근육이나 팔꿈치의 꺾인정도를 그려나가다 보면 쉽게 그릴수 있기때문입니다.
그런데 꺾인팔과 허리사이의 양쪽에 삼각형의 빈 공간 즉, '비실제적인' 부분을 보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그림이 잘못되었다는것을 발견할수 있게됩니다.
겨 드랑이로 시작하여 양팔이 접히는 부분에서 각도를 꺾어, 다시 아래쪽 손목부분까지 그리고 다시
겨드랑이까지 이루는, 삼각형은 우리가 그림을 그릴때에 보이지 않는 Negative한 부분(비실제적,
반대적인 부분)이지만, 우리 그림에서는 분명히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공간의 모습을 보지못하고 팔과 허리의 형태만 보기때문에, 그 빈공간의
형태를 보고서야 비로소 팔의 각도며 허리의 휜정도를 조정할수 있게 됩니다.
즉, 그 여백의 빈공간의 모습을 통해 사물의 형태를 바르게 그릴수 있게되는 것이지요.
...
디자인에 있어서, 여백(餘白)이란 디자인을 하고 남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 여백은 또 다른 하나의 그림입니다.
내가 나무며 잔디 그리고 나의 모습을 그렸듯, 청명한 하늘은 그곳이 설사 색깔이 없는 하얀 '여백'일지라도
그것은 그 그림의 일부이며 그 그림을 완성하는 중요한 공간입니다.
내가 쫙편 '손'을 그린다고 하더라도,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의 가늘고 긴 빈공간은 또 하나의 그림입니다.
그 빈공간이 없이 손가락의 모습은 그릴 수가 없기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백의 공간이 공기가 풍성한 쉼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진공의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디자인에 있어서 '여백'은 디자이너가 표현하고자 하는 종착점(終着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디자인의 컨셉이 의도적으로 여백이 없게하거나 때로는 진공의 상태를 유도하기도 합니다.
하 지만 우리가 디자인을 하면서 관객이나 독자들에게 숨이 막히는 불쾌감을 줄 의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들의
시선(視線)을 편안하게 이끌어야 하겠고, 또한 그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편안하게 쉬었다 갈 수 있도록 쉼터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마치 성악(聲樂)의 발성(發聲)에 있어서 호흡이 중요하고, 한곡의 노래를 끝까지 잘 부르려면 적당한 곳에서
숨을 잘 쉬어줘야 하듯 , 우리 디자인에 있어서 레이아웃에서의 여백(餘白)의 쉼터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정감을 주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풍부한 산소를 제공하는것입니다.
여백의 넉넉함으로, 직접 그려지는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뒷받침해주는 빈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므로써,
그 이미지의 형태를 바로 잡아줄 수 있고, 그 이미지를 보러오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쉼터를 제공하는...
저는 그런 여백(餘白)이 되고싶습니다.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