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劇場)

저는 지금 영화를 보러갑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영화가 개봉됐거든요.
극장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새로 오픈한 최신시설의 극장으로 갑니다.
그곳 음향시스템은 정말 굉장하지요.
특히 팝콘에 뿌리는 버터가 가히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영화는 제작비도 엄청나게 들었습니다.
사상 최고액이라는 뉴스도 보았구요.
배우는 연속 히트작을 냈으니까, 이번에도 정말 기대됩니다.
조연급도 정말 탄탄하답니다.
특수효과는 말할것도 없구요. 지금까지의 영화들과는 비교가 않될겁니다.
제작기간만 보더라도, 두배의 공을 들였으니까요.

영화동호회 등에서는 벌써부터 divx가 돌아다니는데, 저는 일부러 다운받지 않았습니다.
기다린 만큼, 최대한의 감동을 만끽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저혼자 극장에 갑니다.
처음에는 혼자 본다는게 썩 내키지 않았는데, 상영시간에 맞추어 극장에 도착하면 휴게실에서
혼자 기다릴 필요도 없고, 어차피 영화가 시작되면 혼자서 보는것이 더 집중이 잘 되서 훨씬 좋다는걸 알았거든요.
옷은 최대한 편하게, 혹시 에어콘으로 서늘할 수도 있으니까, 얇은 겉옷 하나 걸치고 왔습니다.
안경은 잘 닦고... 물론 예매는 기본입니다. 좌석을 좋은데 잡을려면 미리미리 서둘러야 줘.

자! 이제 도착했습니다.
상영시작 15분 전이군요. 우선 좌석을 한번더 확인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손닦고...팝콘에 버터 뿌리고,
음료수 사서...조용히 제 좌석에 앉았습니다.

... ...

제게 있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화는 매년 수십편이 개봉되지만, 정작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까요.
그것은 제 스스로 제가 좋아하는 영화에 푹빠져 몰입하고 싶을 때, 비디오나 DVD로 볼수 있지만,
굳이 시간을 내서 극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집에서 홈씨어터를 꾸며서 즐길수 도 있겠지만, 극장만큼 대형스크린은 불가능하지요.
내 시야를 온통 스크린에 맞추어, 그 장엄하게 펼쳐질 미쟝센에 나를 내어 놓습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직 나와 영화가 만나는 시간.
핸드폰도 꺼놓고, 그 시간 만큼은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곳은 영화만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들은 얼마나 소중하고,
내게있어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순간들입니다.
내가 선택한 영화, 내가 선택한 직업, 영화에 몰입하고자 극장에 가고, 내가 선택한 디자인을 하려고
매일 나는 집을 나섭니다.

컴컴한 극장에서 내가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은 내 스스로 그곳에 들어가 모든 것을 차단하고
영화만을 위해 내 좌석에 앉아 오직 앞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디자인은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나의 일이며, 디자인을 하는 순간 만큼은
내 스스로 나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기대된다. 어떻게 디자인이 나올지...

그리고는 내 주변의 방해요소들을 하나씩 차단합니다.
물론 회사에서 디자인을 하다보면, 걸려오는 전화도 있고 날아오는 메일이며 메신저 등등...
업무를 위한 것이라면, 그런것들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겠지만, 때로는 내 스스로 그것들을 모두
오픈해 놓고 오히려 기다리며 디자인에 임할 때도 있습니다.
디자인의 시간이 소중하다고 하면서 내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이지요.

어떤 회사에서는 업무외의 일체에 메신저나 사적통화등을 엄격하게 규제하기도 합니다. 얼마전에는
뉴스에서 인터넷 서핑을 못하게 접속제한을 둔 회사도 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또 어느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컴퓨터 사용내역이 모두 데이터로 기록된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것들이 업무에 집중하도록 하는 일종의 잠금장치 일텐데요. 그런 규제가 없다하더라도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허용하는 회사는 없습니다. 다만 자율에 맡기는 거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책적인 규제나 통제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우리가 선택한 나의 일의 가치를 스스로 높여주는가 입니다.
나의 가치가 올라가는것은 내가 스스로 찾은 나의 직업, 나의 디자인에 대한 나의 열정과 통합니다.
얼마나 내가 선택한 직업에 집중하고 소중하게 임하느냐 입니다.
규제나 제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우리 디자이너 스스로 디자인하는 순간에 얼마나 나를 디자인
안으로 내어놓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동안 내가 선택한 일에 나를 집어넣는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간혹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된 후 뒤늦게 자리를 찾느라 앞에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도, 좀 화가 납니다.
영 화는 처음 타이틀 시작부터 엔딩자막이 다 끝날때 까지 감독에 의해 잘짜여진 흐름이 있습니다.
구태여 '기,승,전,결'이 아니더라도 시작에는 그 의미가 있고 전개에서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감독의 모든것을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엔딩의 여운까지, 대부분 주제곡이
맨 뒷부분 엔딩자막과 함께 나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요.

저는 학생들에게 종종 이런 얘기를 합니다. "수업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것이다."라고...
교수는 수업시간 전체를 생각하고 강의를 준비합니다. 중간에 들어와서는 전체내용을 알수없고
단편적으로 알뿐, 교수가 의도하는 바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앞부분을 다시 볼 수 도 없고, 본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희석되고 감독의 의도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후. 아까운 시간과 돈만 낭비하고 반밖에 못건진 셈이 되지요.

회 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편의 영화를 보듯 내 디자인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시작부터의 마지막 마감을
하는 순간까지가 한편의 나의 영화입니다. 그 영화가 대형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일 수 도 있고,
비디오용 일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도저도 아닌 가정용 홈비디오로 전락될 수 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영화를 만드시길 원하십니까?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에 나의 시간과 공간을 잠그고 나를 내어놓으므로써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몰입해서 나를 즐겁게 하는 행위입니다.
내 가 선택한 나의 직업인 디자인을 위해, 이 순간 내가 나를 제어하고 디자인에 나를 내어 놓으므로써
디자인에 몰입하고, 나의 작품이 수십, 수백억을 들여 정성껏 만든 영화처럼 나의 가치를 높인다면,
나는 관객이자 감독으로 그 영화는 완전한 내것이 될 것입니다. 즉 디자인은 내것이 될것입니다.

잠시 나를 바라봅니다.
내가 선택한 나의 이 소중한 디자인을 하는 시간에 누군가와 계속 대화를 하며 분주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 즉시 그자리에서 나오십시요. 그것이 나와 디자인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이며,
나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상사나 동료가 뭐라고 말 않한다고 하더라도, 내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요.
"나는 내가치를 스스로 만들고 있는가?"
그리고 최대한 내가 차단할 수 있는 것들은 끊고,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만큼은 극장(劇場)안으로
들어가듯 조용히 여러분들의 좌석에 앉으십시요.
그리고 앞을 바라보십시요.
...
...

자! 이제 영화가 시작되는군요. 기대가 됩니다.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L^

 

< Back to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