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碑文)
커다란 저택에 나이 어린 주인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그 저택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 주인은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침대 옆에서 늘 따뜻한 우유 한 컵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가면, 칫솔에 치약이 뭍혀 있고 그 옆에는 어김없이 적당한 온도의 물 한 컵이 놓여 있었습니다.
물론, 걸려있는 수건은 늘 뽀송뽀송한 새 것 같은 수건이었지요.
다시 방에 들어오면,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갓 세탁한 듯한 옷이 놓여있었습니다.
그 옷들은 늘 그 주인의 마음에 들어, 기분 좋은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식사는 신선한 과일과 쥬스 그리고 그 주인이 좋아하는 부담 없는 식단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이제 그 어린 주인이 학교로 나설 때에 어김없이 깨끗이 닦아져 있는 구두를 신고, 하인이 열어주는 차문 안으로 들어가 학교로 향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주인은 늘 따뜻한 물이 받아져 있는 욕조에서 하루 동안 더러워진 머리며 손과 발을 씻을 수 있었습니다.
깨끗한 타월이 그 욕조 옆에 준비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었고, 발의 물기가 씻기도록 깨끗한 타월 슬리퍼도 옆에 늘 놓여 있었습니다.
저녁식사나 간식도 늘 새롭게 준비되어있었고, 어질러져 있는 장난감과 책들은 늘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하루를 정리할 시간이 되어, 그 어린 주인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는 침대에 누워, 침대 옆에 놓여있는 책을 보다 잠이듭니다.
곧이어 방에 불이 꺼지고, 방문이 조용히 닫힙니다.
이렇게 하루 이틀 세월이 흘러, 그 어린 주인은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고, 장년을 거쳐 노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늘 하던 대로 아침에 눈을 뜬,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센 주인은, 늘 있어야 할 따뜻한 우유가 침대 옆에 없는 걸 발견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평생을 해왔던 일인데 당연히 있어야할 곳에 따뜻한 우유 한 컵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방 여기저기를 훑어보았습니다. 역시 방 어디에도 그 주인이 매일 아침에 눈뜨면서 마시던 우유 한 컵은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한 주인은 우선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늘 있던 치약이 뭍혀 있는 칫솔은 없었고, 빈 칫솔만 꽂혀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뽀송뽀송한 타월은 걸려있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공허감이었습니다.
"우유 한 컵, 치약이 뭍혀 있지 않은 칫솔 한개 그리고 타월 하나에 이렇게 불안할 수 있을까?"
주인은 혼잣말을 되뇌며, 방으로 돌아왔지만 침대는 좀 전에 일어났던 자리 그대로 정리되어있지 않았고, 깨끗한 옷도 침대 위에 놓여있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그 늙은 주인은 식당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하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모여서 울고 있는 것을 발견 하였습니다.
그 늙은 주인은 조용히 하인들이 모여 울고 있는 쪽으로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하인들 중앙에는 그 주인이 외출할 때에 늘 인자하게 차문을 열어주던, 머리가 하얗게 샌 늙은 하인이 누워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그 늙은 주인은 하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하인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늙은 하인 한 명이 다가와 조용히 울먹이며 대답했습니다.
"이분은 바로 주인님을 평생 모시던 하인입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부엌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 그랬었군. 그래서 아침에 우유가 없었던 게 군! 알았네! 장례는 알아서 치르도록 하고,
그럼 다른 하인으로 교체해 주게!"하며 그 주인은 부엌을 나왔습니다.
그후 며칠이 지난 어느날, 그 늙은 주인은 복도를 지나가다, 우연히 새로 그 주인을 섬기게 된 젊은 하인의 불평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 아 글쎄, 우리 주인은 너무 까다로와요.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 새벽부터 잠들 때까지 불평투성이 예요.
아침에 우유는 늘 따뜻해야하고, 칫솔에는 치약이 적당히 뭍혀 있어야하고, 타월은 늘 뽀송뽀송, 외출복은 매일 세탁하고 음식은 물론 구두며,
목욕물 온도, 침대보 등등 어제는 밤에 불을 안 껐다고 혼났어요. 불은 주인이 끄고자면 안되나요? 정말 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제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 그만 두겠어요."
이 말을 엿들은 그 늙은 주인은 너무 놀랐습니다.
전에는 내가 시키지 않아도 다 해주었는데, 이 하인은 왜 그러지?
하루 종일 곰곰히 생각에 잠겼던 주인은 며칠전 부엌에서 본 나이 많은 '하인장'을 방으로 불렀습니다.
"며칠 전에 죽은, 나를 모셨다는 하인에 대해 듣고싶네. 해주겠나?"
그 늙은 하인장은 그 주인에게 며칠전 죽은 하인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이곳에서 태어나 줄곧 이곳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지요."
"그분이라고 했나?" 주인이 물었습니다. "네! 제가 존경하는 단 한분이지요." 그 하인장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 그분은 평생을 단 한분 주인님을 모시는데 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제가 아는 한 그분은 한번도 주인님을 모시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주인님 깨시기전 새벽부터 주인님 잠드시는 밤까지 주인님이 편안히 하루를 보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일을 묵묵히 자신과의 약속에 최선을 다하신 겁니다.
그분은 늘 '나는 충성된 종이 되고 싶어'라고 하셨습니다. 주인님께는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지만 그분은 그 작은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
주인님보다 한 발 앞서 먼저 최상의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돌아가시는 그날도 새벽에 일어나셔서 우유를 데우느라, 잠시 식탁에 앉아 기다리시다가 앉으신 체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럼, 늙어 죽은건가?" 주인이 물었습니다. "네! 그분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인님을 모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연로하셔서 다른 하인과 교체하려 했지만 그분은 그걸 원치 않으셨습니다."하인장이 대답했습니다.
그 하인장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던 그 늙은 주인은 이렇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벗을 내 옆에 두고 몰랐구나! 그의 장례를 최대한 성대히 치뤄주고, 그의 가족에게 큰 상금을 내리되,
그들이 원하는데로 해주도록 하라. 또한 그의 묘를 우리 가족묘지 내 옆자리에 모시도록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늙은 주인은 평생동안 뒤에서 수고한 그 '충성된 종'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의 빈자리가 한없이 크게만 느껴졌습니다.
그가 죽기까지 원했던 '충성된 종'으로 그는 영원히 그의 가슴에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각자 위치에서 여러분들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물론 크리스찬인 저는 '하나님'이 저의 주인이지만, 평생을 천직으로 하는 '디자인'을 저는 여기서 주인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저는 제가 사랑하는 디자인을 위해, 그 늙어 죽은 하인처럼 죽은 후에 더욱 빛을 발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없을 때 비로소 그 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사람...
여러분들의 비문에는 어떠한 글이 새겨지기를 바라십니까?
저는 저의 비문(碑文)에 딱 한 줄, 이런 글이 남겨졌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디자인의 '충성된 종' 잠들다"
...^L^